글조각

엄마, 엄마 딸이 많이 아파.txt

yesno 2020. 5. 1. 00:00

엄마, 엄마 딸이 많이 아파.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픈 것 같아. 사실 아픈지도 잘 모르겠어. 왜 몸이 아프면 이를테면 머리가 아프구나 바로 알잖아. 

손을 이마에 짚어보고 열은 나나 안 나나 보고. 이가 아프면 며칠을 끙끙 고민하다가도 결국 치과에 가지. 근데 마음이 아픈 건 그렇지가 않아서 내가 마음이 아픈 건지 아님 나약한 건지 항상 그랬던 것처럼 감정기복이 심한 건지 시험기간이라 힘든 건지 몇 분 있으면 금방 나아질지, 도통 모르겠어. 마음이 마음이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 같다.

 

무엇보다 겉으로는 티가 안 나. 아무렇지 않게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에 가고, 아는 사람을 만나면 안 반가워도 반갑게 인사를 하고, 숙제를 하고 시험공부를 하고 혼자 밥을 먹고 다시 아무렇지 않게 자취방으로 돌아와. 그런데 일단 방에 들어오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 정사각형의 자취방이 나를 잡아삼키는 것 같아. 내일까지 내야하는 레포트가 있어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그런 날엔  방에 아예 안 들어오고 바로 카페로 가곤 해. 그럼 방에 들어오면 뭘 하느냐. 앉거나 누워서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핸드폰을 봐. 엄마 나 폰보는거 되게 싫어하지. 나도 내가 폰만 보고 있는 게 싫어.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야. 페북 타임라인에 새 글이 안 떠도 그냥 내려보고, 며칠 지난 단톡방도 그냥 다시 읽어 보고, 카톡 친구 목록도 계속 다시 봐. 내 카톡 친구 목록에는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다 많은데 빨간 동그라미는 없어. 내가 항상 친구목록을 훑으면서 빨간 동그라미를 지워버리거든, 별 생각 없이. 아니다, 사실 별 생각은 해. 가나다순으로 배열된 사람 이름 보면서 내가 죽으면 누가 내 장례식에 와 줄까, 생각도 하고. 악취미지, 그치? 그러다가 너무 외로워지면 누구한테 갠톡이라도 보내볼까, 전화라도 해볼까 하는데 그럴 수 있는 사람도 없어. 학교에 가서 과 사람들 동아리 사람들한테 나 아싸야, 하고 농담하듯이 말하면 에이 네가 왜 아싸야, 맨날 아싸래라는 답이 돌아오지만 엄마, 엄마 딸은 대학교 가서 친구 하나 못만들었어.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 가끔 밥도 같이 먹을 수 있는 사람, 불러서 편의점 의자에서 술이라도 한 잔 할 수 있는 사람, 자취방에 혼자 있을 때 전화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남들 눈에는 내가 멀쩡해 보이겠지. 

남들 눈에 멀쩡해 보이는 건 정말 쉬운 일이니까.

 

언젠가부터 이상하게 하루종일 배가 고파. 속이 텅텅 빈건 아닌데, 오히려 속은 더부룩한데, 자꾸 뭘 먹어야 할 것같아. 그러면 이상한 힘에 이끌려서 음식을 만들거나 뭐라도 사다가 먹어. 먹을 때 마다 내 목구멍이나 뱃속에 음식을 넣는 게 아니라 머리 속에 있는 검은 자루에다가 집어넣는 것 같아. 먹어도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는데 어느 순간 한 그릇이 다 비워져 있어. 나 원래 양 작아서 밥 한공기도 다 못먹고는 했었잖아. 그런데 요새는 뭘 먹어도 남기는 법이 없어. 근데도 맛이 기억나지 않아서 자꾸 더 자극적인 맛을 찾게 돼. 지금 새벽 두시가 넘었는데 방금도 프라이팬 한 가득 짜고 매운 음식을 만들어 먹었어. 저녁은 저녁대로 배부르게 먹었는데. 웃긴 건 학교에서는, 남들 보는 앞에서는 그렇게 많이 먹지 않는다는 사실이야. 먹방을 찍는 bj처럼 정신없이 먹는 건 혼자 있을 때뿐.

 

친구도 없고 시간이 많으니 공부라도 할까. 공부는 공부대로 안돼. 얼마 전 이번 학기 첫 시험을 쳤는데, 정말 어떻게 공부를 하는지 생각이 안 나더라. 처음 들은 전공 수업인데,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하고 열심히 해오던 학문의 첫 전공 수업인데, 문자 그대로 이걸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모르겠는 거야. 공부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전공책이 있는데 이걸 소설책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하나? 아니면 소리내서 읽어야 하나? 노트필기를 할까? 그런데 노트필기는 어떻게 하는 거였지? 그냥 처음부터 손으로 베끼면 되나? 그럼 시간이 많이 걸릴 텐데... 바보가 된 기분이었어. 1학년이었을 때는 처음 대학에 다니는 거니까 대학생다운 글을 못 쓰는 것도 학점이 안 나오는 것도 괜찮다는 핑계가 있었는데 고학년이 된 지금은 내가 왜 대학생인지 어떻게 대학생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 주변 사람들은 전공 수업을 잘 따라가고 미래에 대한 계획도 있고 일을 척척 해내는데 나는 정신도 사고력도 아직 도등학생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 고등학교 때 나는 똑똑하고 반짝거렸는데, 또래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그 또래들은 다 대학생으로 커버렸지만 나는 대학생으로 자라지 못하고 발버둥치고 있어. 실험 수업을 들어도 철학 수업을 들어도 대학생다운 제대로 된 레포트 하나 못 써내. 

내가 쓴 글을 읽어보면 항상 너무 부끄러워. 그런데 그런 부끄러운 글 하나를 뽑아내기 위해서 나는 바을 새야 하고 중도에서 빌린 책을 책상에 쌓아놓고 무슨 졸업논문 쓰는 것같은 야단을 떨어.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너무 한심해. 요새는 도서관에 앉아서 전공서를 펼쳐 놓으면 공부가 너무 하기 싫어서 책 속으로든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을 정도야.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커질 떄마다 화장실에 가서 칸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변기 위에서 멍하니 안자 있다가 돌아와. 그런지 좀 되었는데 최근 그렇게 화징실에도 도망갔다 오는 일이 잦아졌어. 내일모레가 시험인데... 너무 한심하지 나는 요새 내가 너무 싫어.

 

자취방에 들어오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고 했잖아. 심지어 잠자리에 들기도 싫어. 고등학교 때 워낙 잠을 많이 자서, 잠 때문에 고생했던 내가 맞는지 신기해. 하루가 가는 게 아까운 건지 내일 오는게 싫은 건지 누워서 잠을 청하기가 싫어. 깨어 있으면 뭔가 생산적인 일이라도 할 것같은 생각 때문인데 깨어 있으면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때워. 지금도 이런 글이나 쓰고 있잖아. 엄마는 눈을 부릅뜨고 일찍 자라고 하겠지만... 미안해. 잠을 자기가 싫어. 아까는 샤워를 하면 잠에 좀 들고 싶을까, 기분은 좀 나아질까 싶어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어. 사싪 샤워기를 틀어 놓고 좀 울고 싶어서... 머릿속은 눈물을 머금은 스펀지처럼 축축하고 무거운데 결국 울음은 안나오더라.

 

머릿속에는 생각이 너무 많아. 그 많은 생각들 중에서 요새는 즐거운 생각이 별로 없어. 빨리 쫓아내버리고 싶은 잡념과 이유없는 불안과 남들에게 틀킬까봐 부끄러운 생각들밖에 없어. 웃기지 않아? 생각은 남들이 보지 않는 건데 나는 이제 생각을 할. 때도 누구 눈치를 본다. 나는 오새 실은을 할까좌, 구체적으로는 내 머릿속에는 부끄러운 생각을 카톡창에 쓰고 누구한테 보내버릴까봐 너무 불안해. 불안해서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 사람, 불안해서 집 밖에 나가지 못하는 사람, 불안해서 사람 많은 곳에 가지 못하는 사람... 수업시간에 배운 다양한 불안증 환자들이 이제는 좀 이해가 갈 것같아. 내 병명은 뭐쯤 될까. 불안해서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 생각하는걸 멈춰 버리고 싶은데, 그러면 내가 정말 바보가 되겠지.

 

생각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무엇보다 마음이 너무 아픈데 뭐부터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도망가고 싶어. 훌쩍 떠나고 싶어. 참 모순적인 마음이 든다. 사람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데, 누군가 나를 찾는 사람은 있어주었으면 좋겠어. 그 누군가가 누군지는 모르겠고, 일단 엄마인 것을 알기에 엄마를 향해 글을 쓴다.

 


 

출처: 서울대학교 대나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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