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조각 21

드라마 도깨비 시놉시스. txt

도깨비 김신(939세로 추정) 그의 이름은 복선이었고 스포일러였다. 백성들은 그를 신神이라고 불렀다. 시뻘건 피를 뒤집어쓴 채 푸르게 안광을 빛내며 적들을 베는 그는 문자 그대로의 무신武神이었다. 덕분에 숱한 전쟁에도 백성들은 두 발 뻗고 잘 수 있었다. 평화로운 밤이 계속될수록 백성들은 김신이 왕인 꿈을 꾸었다. 그는 적의 칼날은 정확하게 보았지만 자신을 향한 어린 왕의 질투와 두려움은 보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지키던 주군의 칼날에 죽었다. 하루 중 가장 화창한 오시午時. 영웅으로 살다 역적으로 죽어가며 바라본 하늘은 시리도록 맑았다. 천상의 존재는 상인지 벌인지 모를 늙지도 죽지도 않을 생을 주었고, 그로부터 939년 동안 김신은 도깨비로 살았다. 심장에 검을 꽂은 채로. 죽었던 순간의 고통을 오롯..

글조각 2020.05.02

엄마, 엄마 딸이 많이 아파.txt

엄마, 엄마 딸이 많이 아파.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픈 것 같아. 사실 아픈지도 잘 모르겠어. 왜 몸이 아프면 이를테면 머리가 아프구나 바로 알잖아. 손을 이마에 짚어보고 열은 나나 안 나나 보고. 이가 아프면 며칠을 끙끙 고민하다가도 결국 치과에 가지. 근데 마음이 아픈 건 그렇지가 않아서 내가 마음이 아픈 건지 아님 나약한 건지 항상 그랬던 것처럼 감정기복이 심한 건지 시험기간이라 힘든 건지 몇 분 있으면 금방 나아질지, 도통 모르겠어. 마음이 마음이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 같다. 무엇보다 겉으로는 티가 안 나. 아무렇지 않게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에 가고, 아는 사람을 만나면 안 반가워도 반갑게 인사를 하고, 숙제를 하고 시험공부를 하고 혼자 밥을 먹고 다시 아무렇지 않게 자취방으로 돌아와..

글조각 2020.05.01

눈사람 자살 사건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 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

글조각 2020.04.30

서강준 GQ 인터뷰 발췌 20181226

배우 서강준과의 낮고 조용한 대화 서강준은 존재와 고독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빛보다 어둠이 편한, 기척 없이 움직이는 한 남자. 눈이 묘하네요. 그래요? 색이 옅어서 홍채 무늬가 보여요.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아주 어릴 때부터. 저처럼 눈동자가 밝은 사람은 체질적으로 햇빛이 안 맞는데요. 햇빛을 받으면 어떤데요? 힘이 빠져요. 집에선 암막 커튼 쳐놓고, 밤엔 형광등 대신 약한 불빛만 켜요. 야행성인가요? 보통 새벽 5시쯤 자고 낮 12시쯤 일어나는 리듬이에요. 밤은 오롯이 제 시간이에요. 고양이들이랑 놀다가, 적적하면 책도 들춰보고, 숨 쉬는 것도 느껴보고. 그냥 시간이 흐르게 둬요.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한 사람 같네요. 맞아죠. 친구도 몇몇이 전부예요. 사실 제겐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

글조각 2020.04.30

운동화만 신는 친구.txt

최근 한 교수님과의 간담회가 있었다. 교수님은 학생들을 둘러보면서 요새 무얼 하고 사느냐고 질문하셨다. 막 기말고사가 끝나 지쳐있던 학생들은 대부분 공부 하는데 시간을 보내며, 틈틈이 알바나 과외 같은 걸로 용돈을 번다고 대답했다. 우리의 대답을 들은 교수님은 혀를 끌끌 차셨다. 요새 아이들은 참 낭만이 없다고 했다. 시험기간이 되어 공부하는 건 이해한다고 해도, 바쁘 지 않을 떄에도 스마트폰만 뒤적이고 카페에서 노닥거리기만 한다는 것이다. 차라리, 방학에 여행이라도 떠나라고 하셨다. 훗날 떠올리면 여행했던 날들만 기억에 남지, 이렇게 공부나 하고 알바하며, 커피마시고 카톡 하며 빌빌대는 삶은 다 부질없다고 하셨다. 나도 교수님의 말씀에 부분적으로 공감했다. 하지만, 하루하루 알바를 끝내고, 커피한잔씩 ..

글조각 2020.04.30

아이유 인터뷰 발췌 20200323

Lucky Spring (아이유) 아이 때부터 어른이었던, 몸은 작아도 생각은 큰 사람. 구찌 앰배서더 아이유는 안전했던 자기만의 세상을 이제 보다 넓고 다르게 만들어가길 꿈꾼다. 그 확장의 순간에 그녀를 바라볼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음악을 완성하고 공연하는 희열과 연기를 해내는 희열은 어떻게 다른가? 한 곡이 작업실부터 녹음실을 거치는 과정과 촬영장에서 연기가 여러 차례 테이크를 거칠 때의 과정이 상당히 비슷하다고 느낀다. 판단을 거듭해 최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짧지 않은 시간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큰 의지가 생긴달까? 물론 내 부족함에서 오는 괴로움도 그 시간만큼 많이 겪지만, 그런 시간들이 가장 심장이 빨리 뛰고 피가 도는 순간인 것 같다. 그런데 공연은 이와 아주 다르다. 판단이라는 걸 할 ..

글조각 2020.04.29

나는 정신을 2004년에 처음 만났다.

우연히 홍진경이 쓴 편지를 봤다. 나는 정신이라는 사람을 모르지만 그 사람이 정말 부러워졌다. 이런 편지를 생일선물로 받다니. 홍진경이 쓴 다른 글들도 있어서 읽어봤는데 글이 참 따뜻하다. 그녀는 좋은 사람인 것 같다. 흰 쌀밥에 가재미얹어 한술뜨고 보니 낮부터 잠이 온다. 이 잠을 몇번 더 자야지만 나는 노인이 되는걸까. 나는 잠이들며 생각한다. 다시 눈을뜨면 다 키워논 새끼들이랑 손주들도 있었으면 좋겠다. 수고스러운 젊음일랑 끝이나고 정갈하게 늙는일만 남았으면 좋겠다. 그날의 계절은 겨울이였으면 좋겠다. 하얀눈이 펑펑 내려 온통을 가리우면 나는 그리움도 없는 노인의 걸음으로 새벽 미사에 갈 것이다. 젊은날 뛰어다니던 그 성당 문턱을 지나 여느날과 같은 용서를 빌고 늙은 아침을 향해 걸어 나올 때 그날..

글조각 2020.04.29

늦은건 없습니다 .txt

넓은 백양관 대강당에 자는 사람이 반, 강의를 듣는 사람이 반. 백발의 교수님은 느리지만 차분하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하셨어요. '나는 여러분 나이 때 삼수를 했습니다.' 옆 사람이 움찔하면서 잠에서 깼어요. 삼수? 여기저기서 뜨이는 눈들을 보신건지, 교수님의 눈가에 살짝 웃음이 감돌았어요. '이 연세대학교에 들어오려고 삼수를 했어요, 내가. 삼수.' 그래. 네가 들은 게 맞다, 라는 듯 교수님은 몇몇의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시작하셨어요. 교수님은 삼수생이셨어요. 연대생이 되고 싶어 삼수를 하셨대요. 현역, 그리고 재수 생활 때 닿을 듯이 닿지 않은 연대가 가고 싶어 삼수를 하셨대요. '많이 늦었지. 많이 늦었어요. 대학교도 늦게 왔으니, 군대도 늦게 갔고.' 어디든 따라다니던 '삼수'의 ..

글조각 2020.04.29

첫사랑 이야기.txt

그는 새벽에 전화를 했다. 전화의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내가 혼자 있다가 자해를 하지 못하게, 나머지 하나는 그가 자해를 하지 못하게. 사실 우리는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 나는 907호, 그는 809호. 전화를 하다가 문득 소리가 끊기거나 두려운 소리가 나면 언제든지 뛰어올라오거나 혹은 뛰어내려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느 한쪽이 먼저 잠들었다. 보통은 그가 먼저 잠들었다. 그는 고3이었고, 나는 고2였으니까. 한 살이라도 어리니까 더 쌩쌩한 거라고 나는 장난 식으로 말했다.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는 늘 어깨가 쳐져 있었다. 쳐져? 처져? 뭐가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축 늘어져 있었다는 뜻이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집 앞 놀이터에서였다. 미끄럼틀 위에 앉아 청포도사탕을 빨아 먹고..

글조각 2020.04.28